한국 복식 예절에서 복식의
변천에 대하여 알아보자.
삼국시대 및 고구려 시대의
복식이 변천되어 오늘날의 복식 예절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하여도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삼국 이전의 상대 사회 복식의
기본형은 대체로 상의로는
저고리인 유, 하의로 바지인 고, 치마 상, 두루마기로서의
포를 중심으로 하고 여기에
관모, 대, 화 또는 이를 착용했다.
이것은 한 대성 의복,
즉 북방 호북 계통의 의복을 나타낸다.
저고리는 단의로 수구가 좁고,
바지는 폭이 좁다.
바지에는 양복바지와 같은 궁고,
지금의 우리 바지와 같은 대구고,
가랑이가 짧은 잠방이 같은 곤이 있었다.
궁고는 서민층이,
대구고는 귀족 계급이 입었다.
여자도 바지를 입었으며,
그 위에 치마를 착용하는 것이 의례적이다.
포는 표의로서 두루마기와 같은 형태로
방한과 의례적인 목적으로 유, 고 위에 입었다.
포에는 소매가 좁은 착수포와
소매가 넓은 활수포가 있었다.
대에는 은대, 포대, 혁대 등이 있었다.
관모는 복식 중에서도 가장 변천이 많고 복잡하며,
건, 모, 관의 순서로 발전하였다.
이는 신발이며,
목이 긴 북방 계통의 화와
운두가 낮은 남방 계통의 혜가 있었고,
이 두가지가 혼용되었다.
유와 포에는 선을 둘렀는데,
이 선은 연이라고도 하며,
깃, 도련, 수구에 장식으로 둘렀다.
고구려의 관모에는
책, 절풍, 조우관이 있고 왕은 오채복,
관인은 대수삼, 통수삼을 입었고,
서인은 갈옷, 부인은 군유를 입었다.
백제에서는 왕복으로
대수자포에 청금고를 입고,
소피대와 이를 신고,
오라관을 착용했다.
서민은 왕의 복색인 자색과
관인의 비색을 금하고 유, 고, 포를 입고
대의 색으로 관민을 구별하였다.
신라에서는 금관의 착용이 특이하며,
신발은 세라 하였고,
관을 유자례라 하고,
유를 위해, 고를 가반이라 하였다.
삼국의 복식은 대체로 흡사하였다.
부녀자의 저고리는 장유로써 선을 두르고 띠를 매고,
치마는 넓은 주름을 발목까지 잡은 군을 착용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당의, 원삼, 활옷, 복두, 반비, 표 등이 등장하였고,
제42대 흥덕왕 때 극심한 사치로
복식 금제령이 내려졌다.
고려시대에 새로 등장한 복식에는
몽수. 족두리, 가채, 도투락댕기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남, 녀 복식은
물론 왕복, 백관복, 사인복, 천인복 등의
엄격한 구분과 신분제도에
따른 의례복식과 일반 복식,
복식용어 및 제도가 정착되고,
찬란한 복식문화를 이루었다.
색깔과 직물에 있어서도
복식금제를 받아 서민들은
주로 담백한 색조나 흰색의 소박한 재료로
만든 옷을 입게 되었다.
고종 21년 갑신정변과 더불어 복제 변경을 단행하였고,
갑오경장 후 고종 32년 개화사상에 의하여
단발령을 내려 상투를
자르도록 명하였으며,
개화기에 양복이 들어왔다.
한복을 간편하게 개량하여 짧은 치마와
긴 저고리, 양말, 구두 등을
전도 부인들이 먼저 착용하였으나,
여염집 부인들은 계속해서
짧은 저고리에 긴치마를 입었고,
장옷이나 쓰개치마 대신 양산을 들고 다녔다.
여자 복식은 다행히 외부의 영향을 적게 받았다.
그러나 궁중예복 중
적의, 노의, 원삼, 활옷, 장삼, 당의, 스란치마, 족두리, 화관 등은
중국 복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 우리 문화 양식에
맞게 발달되었고,
우리의 의식구조에 맞게
한국 복식화 되었다.
지금은 아름답고 좋은 풍속에
영향을 받아 변천되어서
격식에 따라 적용 되고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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